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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 you hear it?”



                                                                                                                                                                   이선영 (미술평론)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가을 저녁에 숱이 많은 나뭇잎들을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는가. 나뭇잎들은 명확한 형태를 갖춘 식물의

 부속기관 같은 것이기보다는 보는 이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수많은 형태로 변신하곤 한다.

 다양한 크기와 각도로 붙어있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움직이며 순간적으로 이루어내는 형상들, 기기묘묘하게 펼쳐지는 형태들의

 이합집산은 살랑이는 나뭇잎에 무심히 던진 시선을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그것들이 환상인가 아닌가 의심할수록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게 하는 그 세계는, 단지 주관적인 착각도 자연의 기만도 아닌 또 다른 세계이다. 작가 김현수는 자연의 마술이

 펼치는 이 또 다른 세계를 주목한다. 아니 주목을 너머서 이 세계를 듣고자 --Can you hear it?(전시부제)--한다.


 아삭아삭 소리를 낼 것 같은 하얀 한복 안감 위에 펜으로 가늘게 구불구불 그어 만든 나무와 나무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변주들은

 우선 그 바스라질 것 같은 섬세함이 특징이다. 반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천 위의 드로잉을 여러 번 겹쳐서 만들어낸 나무의 형상들

은 인위적인 재현의 그물 망으로는 고착될 수 없는 자연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평평하게 당기지 않은 천의 질감은  한번

에 포획될 수 없는, 그리고 우회적인 여러 겹의 과정으로서만 언뜻 자신의 모습을 내보여줄 뿐인 자연의 양상들을 표현하기에 적합

한 것 같다.

 

 그녀의 작품 속의 자연은 늘 크고 작은 사건들로  분주한 듯 보이며, 반복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미시세계와 거시세

계의 질서가 동형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은 프랙탈 형상 같은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동일성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나무라는 분명한 재현 대상, 요컨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 1의 참조물로부터 출발하지만, 연기처럼 섬세

하게 뻗어 가는 그 섬세한 언어 속에서 그 어떤 참조 틀로도 고정시킬 수 없는 미묘한 것들을 펼쳐내고 있다. 그것은 나무나 숲의 풍

경이지만 유기체의 온전한 형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뿌리를 두고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알 수 없는 끝없는 이동의 흔적들

만 존재한다.



 가늘게 종횡무진으로 뻗어 가는 선의 궤적들은 그 이전의 이미지들의 자그마한 변주들이며 서로 간에 유사성을 이룬다. 그러한 의

미에서 김현수의 숲이나 나무의 풍경들은 자기 반사적이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자기 반사성에 기반을 둔 유사성들의 세계인 것

이다. 이 끝없는 유사의 세계에서 재현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재현에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시간성을 적

극 도입한다. 정처 없이 흐르는 선의 흐름은 시간성을 각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상적 시간성이 아니다.  들뢰즈는  [프

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재현주의가 전재하는 표상representation적 시간성을 비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표상이란 말에서 접두사

 re-는 차이들을 자기아래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상적 시간관에 반대하여 들뢰즈는 환원 불

가능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시간성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김현수의 작품에서도 시간은 연속적인 하나의 선 혹은 주체의 활동의 소산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시간은 주체가 거머쥘 수 없는 즉

자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시간성은 온갖 형태의 전체화를 거부하고, 다양한 층위에서 환원 불가능한 차이성을 드러나게 한다. 

자연을 재현의 틀이라는 동일성의 방식이 아니라 차이로서 감지하기 위해, 작가는 우선 주목하는 자연의 대상을 괄호에 넣고 의식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리오타르는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현상학적 방식이란 시

선의 방향을 변경시켜 세계를 중지 상태에 둠으로서, 은폐되었던 진리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지 어쩐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실재란 바로 우리가 지각하는 바이기 때문

이다. 물론 여기에서 지각은 완전히 주관성에 함몰되지 않는다. 김현수의 작업은 자연에서 출발하며, 그 결과물이 언뜻 추상적으로 보

여도 추상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자연의 자연스런 과정을 그대로 살리고자 노력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가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

들리는 과정을 그대로 포착한 사진 작업이 있는데, 여기에서 작가는 자신의 적극적인 관여를 포기하고 단지 프레임만을  선택할 뿐이

다.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대상들은 우리들 마음들의 단순한 투영들이나 혹은 구성물들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감각작용은

 수동적인 기록행위도 아니며, 능동적인 의미부여도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감각한다는 것은 그것과 공존하는 혹은 교류하는 것, 그

것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방을 통해 세계의 진면목이 지각된다.


김현수의 작품은 자연 앞에 선 주체의 현존presence의 경험이 드러나 있다. 명확한 환원보다는 산란의 양식을 취한 그녀의 방식은 자

연 속에서 느꼈을 그녀의 경험에 대해 혼돈, 내지 착각으로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 즉 체험된 바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현존의 경

험을 실타래처럼 풀어낸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이 단일하고 구체적인 총체성이 지니는 추상적인 운동의 세계이다. 이러한  현존성의 

체험은 '우리 자신의 살이 자기 감각작용이 되게 하는 그러한 파동과같은 휘감김을 통해 야성적 존재로부터 의미가 출현하는 것'(메를

로 퐁티)이다. 작가는 경험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에게 최초로 주어진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이러한 '야성적 존재에 대한 감각적 움켜쥠'이 되고, 작품은 '이 원초적 휘감김 혹은 접힘을 드러내는 것'(메를로 퐁티)이

 된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경험이 지니는 불가해한 풍부함을 새로이 일깨우려는 시도 속에서 펼치는 지각에 대한 기술이다. 이러한 '지각

의 현상학'은 자연과 주체 사이의 상호성 속에서 펼쳐지는 끝없는 관계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김현수의 작품에 나타나는 끝없는 분절

들은 자연에 대한 지속적인 신선한 발견들을 허락한다.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듯이 화가는 눈과 마음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지는 바라봄

을 통해 가시적인 것 내부로부터 가시적인 것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작가가 일관되게 견지하는 드로잉이라는 형식에서 암시되는 시간성은 흘러가는 실체도 아니요, 기록되는 제삼자적 과정도 아니다.

 그와 반대로 시간은 세계와 우리와의 관계로부터 존재하게 된다. 김현수의 작품에서 미세하게 분절되고 끊어질 듯 가느다랗게 연결되

는 선들이 가지는 시간성은, 시간을 일련의 구별되는 물결들 대신에 단일한 물의 분출만이 존재하는 샘에 비교되는 현상학적 시간관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서 시간이란 분리된 순간들, 혹은 사건들에 대한 보존된 상들로 이루어진 단일한 선이 아니라, 원초적 지향성으

로서의 신체-주체를 그 자신의 중심으로 갖는 그러한 서로 겹치는 지향성들의 망 조직이다.


이 맥락에서 작가가 액자 틀이나 라이트 박스 등으로 순간적으로 고정시킨 작품들에 나타나는 시간성 역시 폐쇄되어있지 않다. 시간의

 개방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연작의 형식을 사용한다. 그 현재는 미래와 과거라는 양방향으로 자신의 범위를 뛰어 넘는다.  리오타

르에 의하면 현상학적 시간성은 우리가 사념하거나 혹은 관찰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생생한 우리 삶의 과정이다.  작가는 어떻게 진정

한 시간, 즉 우리이 일시성, 지속, 그리고 영원성의 개념의 근거가 되는 그러한 원초적인 시간경험을 기술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한다.



 작품은 현존의 장이 되어 우리가 시간적 차원들의 상호관계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듯이 시간은 외부적인 사건들 

혹은 내적인 상태들의 연쇄가 아니라, 바로 맞물려있는 현존의 장들의 연쇄이다.

작가는 이 현존의 장들의 연쇄에 개입하면서 새로운 현재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시간적 망조직 전체를 변형시킨다. 시간성temporality으

로서의 주체는 그 자신이 항상 세계 속에 놓여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