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부조리한 놀이터에서의 천진한 놀이

         

                                                                                                                                                                                            -최광진(미술평론)



1.


오늘날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가 과거 미개발된 사회보다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근대화 이후 기술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삶은 경제

적으로 부유해졌지만,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강도는 오히려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자본의 가치에 의해 퇴색되고,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이데올로기들이 개인을 억압하는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행복은 어쩌면 도달하기 어려운 로망일지도 모른다.

김현수의 작업은 그러한 삭막하고 부조리한 사회현실과 내적 자아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그러한 갈등을 자연을 통해 매개하고자 했다. 자연에 대한 관

심은 첫 개인전을 연 2003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일관된 주제였다. 군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군부대가 있는 산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

낸 그는 자연에서 느꼈던 친밀한 교감이 따스한 어머니의 품처럼 잊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고, 자연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빈자리를 채워줄 유

일한 대체자가 되었던 것 같다.


조용하고 침울해 보이는 화면에 바람과 식물의 잔상을 담아내었던 초기작들에서 자연은 일방적인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산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의 촉

각적 세례와 새벽녘 풀잎 내음의 후각적 만취, 그리고 바람에 웅성거리는 나뭇잎과 새소리의 청각적 울림, 그는 이처럼 시각으로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존재를

 오감으로 느끼고 교류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과 공명하며 소통했던 섬세한 느낌들을 실크 천에 드로잉하고,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들로 물들이며 조형화했

다. 이러한 자연과의 공감각적 교류를 통해 그는 고통스럽고 불안한 자신의 내면을 치유 받고자 했다. 이것은 자연이 선물하는 감각적 자극을 통해 지금 여기

의 순간에 머무르게 되는 망아의 체험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문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삶 저편의 것으로 쉽게 밀어놓기 마련이지만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면일 뿐이다.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지금 여기는 기적과도 같은 또 다른 세계

의  삶이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연이 내품는 생의 변화에 민감할수록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오가는 문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2007년 작가노트)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에서 생사를 초월한 자유를 얻고자 한 이러한 의지는 그림의 형식을 탈속적이고 미시적인 식물의 이미지로 채우게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이러한 식물적 사유와 자연을 향한 동경은 사회적 소통가능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며, 자연은 그 허전한 마음을 채우는 은신처가 되었다. 그

러나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자연에 동화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자신이 내딛고 사는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2.

이러한 수녀 같은 초기의 작업태도는 자연을 향한 짝사랑이 다소 식어가는 2010년경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연에 동화되려는 의지 자

체가 나와 자연의 분리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이다. 동양적 우주관에 의하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도 자연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접근을 살며시 내려놓은 순간, 나를 둘러싼 실재는 모호하지만 역설적으로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낀다.… 이제 멀리서 자연

을 바라보는 대신 내 몸을 통해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구체적 대상과 교류하면서 자연이 일상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2012년 작가노트)


2012년 갤러리 담에서 열린 개인전은 자연에서 채취한 식물들의 질감과 형태들을 인간적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인간의 동물성과 자연의 식물성이 중화된 형태

들을 만들었다. 그것은 식물의 동물화와 동물의 식물화가 서로 동등한 힘으로 진행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에서 원래의 모티브가 되었던

식물들은 자신들의 위풍당당함을 과시하며 제법 인간스럽고 동물성이 느껴진다. 그것은 식물의 발언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키면서 그 접점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변신을 통해 그는 자연을 향한 일방적인 짝사랑을 조심스런 교제의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3.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근작들은 자연과의 조심스러운 교제 단계가 심화되어 신나는 놀이의 차원으로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숭배의 대상으로서 자

연의 역할을 놀이의 대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가능했고, 자신의 심리적인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면서 생긴 자신감의 표출로 보인다. 그러면서 침울했던 화

면은 생기가 넘치고, 화폐와 탱크 같은 이미지들이 새롭게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게 된다.


산속의 군부대가 있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그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탱크를 바라봤고, 호기심 많은 그의 눈에 탱크는 그저 

크고 튼튼한 놀이기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한국의 산속 곳곳에서 군사시설과 군인들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때 묻지 않는 자연 속에 감추어진 이런 

흉측한 인간문화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국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부조리함을 고스란히 반영된 문화현상이다.


전국토의 70프로가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공존하는 군사문화를 그는 천진한 유아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자연에서 채취한 식물의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형상화했다. 그의 작품에서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식물들로 만들어진 탱크는 사람을 살생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개미하나 죽

일 수 없을 것 같이 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한국의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무기로서의 탱크가 식물들의 해학적인

 자태로 풍자된 놀이기구로 변신한 것이다. 


그리고 탱크가 누비고 다니는 자연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화폐 속의 자연이다. 그것은 사람간의 인정과 인간 본연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돈이모든 가치를 대변

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이자 서구적 자본주의로 물든 오늘날 한국사회의 풍경이기도하다. 그는 작품에서 화폐의 이미지는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오늘

날의 한국사회의 문화적 풍경으로 보인다. 그는 화폐의 부분을 확대하여 종이에 전사하는 방식으로 배경을 삼음으로써 재화적 가치로서 주고받는 수단으로서

의 화폐를 스스로의 목적을 지닌 존재로 변모시켰다. 


그의 초기작에서 부조리한 사회 환경을 피하기 위한 장소로서 자연이 다루어졌다면, 이제는 그러한 현실을 어린이들의 놀이터처럼 다룸으로써 해학적 반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나 자본주의를 인식하기 이전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낭만적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그의 근작들은 호기

심 많던 어린 시절의 짓궂은 장난기와 열린 감각으로 산바람 강바람 맞으며 마음껏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복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유아적

 환상이 사회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자신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했던 낭만적 향수를 끄집어냄으로써 최근 그의 작업은 활력

과 생기를 얻고 있다.    


4.

그의 근작들의 주제가 되고 있는 ‘놀이’는 나와 대립된 상대와 어울려 하나로 어우러지는 가장 비정치적인 행위로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대한 그의 낭만적 해

법이다. 

싸움은 상대를 정복하고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수행한다면, 놀이는 상대를 통해서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상대와의 관계가 일방적이 될수록 놀이

의 흥미는 사라지는 법이다. 이러한 놀이의 철학에는 나와 남의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상대를 통해  존재하는 자연의 이치가 간직되어 있다. 이러한 놀이의 

메커니즘을 통해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분법적인  사고와 이로 인해 형성된 부조리하고 경직된 사회를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은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세속과 탈속, 현실의 부조리함과 낭만적 이상이 공존하는 놀이터가 되고 있다. 여기에 시각적 논리와 상관없이 마음의 즉흥적인 충동에

따라 천연덕스럽고 해학적으로 펼쳐지는 조형 방식은 인간의 순수한 본능을 자극한다. 화폐 속의 풍경에서 시작된 상상은 유년기의 추억과 천진한 낭만적 

환상이 우연적으로 결합하며 예키지 않는 화면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 서민들이 그린 민화처럼 소박하고 자유롭다. 민화의 양식이 파격적인 

것은 전통적인 양식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박한 소망을 담으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김현수는 본능에 따르는 자유로운 조형언어를 통해 인간의 문화와 자연의 섭리가 경계 없이 놀이로서 어우러지는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천진한 

민성(民性)의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소박하고 천진한 낭만과 소박한 민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민(民)의 철학적 의미는 본래 피지배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계급화 되기 이전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본성을 의

미하는 것이다.

민화뿐만 아니라 동물과 인간이 어우어진 이중섭의 가족도나 장욱진의 유아적 그림, 그리고 김기창의 바보 산수 등도 그러한 민성을 계승한 것이다. 김현수 

근작 역시 자신의 소박한 민성을 드러냄으로써 민화의 정신성을 계승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소재나 양식적으로 민화를 계승하는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현

대적인 조형어법을얻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천진한 이상은 과거 조선인들의 소망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사회 환경을 살고 있는 자신의 꿈이자 동시대 한

국인의 소망인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자신의 고유한 정서와 민족적 미의식의 고리를 연결하고, 그것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승화시키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

리고 심리 치유의 차원에서 진행된 과거의 예술행위가 이제는 공공의 차원으로 승화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