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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현존 - 공감각적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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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수의 작업을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나뭇가지의 흔들림,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이다.  몇 개의 단순한 선으로

 집약되는  그 이미지들은 초여름의 쨍쨍한 햇빛과 나무그늘 사이에서 들려오는 시원하고 따가운  매미소리, 그것과 어우러져 일어나는 가벼

운 현기증과도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발산되는 자연적 느낌은 단순히 자연을  상징하는 시각적 기호의 사용에서 오는 것

이아니라,  자연 그 자체의 강한 존재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관심은 한밤중에  문득  체험한 창 밖 나무들의 시끄러

운 웅성임에 대한 환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특정한 사적 경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연의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공감

각적인 방식에 본능적으로 익숙해 있다. 한적한 오후 혼자 산길을 걸을  때 만날 수 있을 법한 침묵의 풍경들  속에서, 우리는 순간적으로 멈추

어진 어떤 시공간 안에서 자연 그대로의 에너지가 맴도는 듯한 청각적인 울림을 경험하곤 한다.


김현수가 추구하는 이미지들은 스틸 사진과도 같이 시각 속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공명처럼 어떠한 분위기, 어떠한 상태로서  존재하

고 있는 것들이다. 그가 자연의 재현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서도 직접적인 재현의 방식을 피하고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와도 같이 어디엔

가 비추어져 다시 투영된 형상들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은 주지할  만하다.

김현수는 이처럼 분명히 그 곳에 있지만 직접적으로 만질 수 없으며, 결코 완전히 포획할 수 없는 이미지들을 형상화한다. 순간순간 경험하는 

직관적인 느낌과도 같이, 경계선을 분명하게  도려낼 수 없고 대개 어른거리는 잔상들로만 남아있는 그 이미지들은 분명 시각적인 평면작업으

로 환원되기에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렇기에 김현수의 근작들에서  천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발견되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천은 그

 자체의  애매모호한 공간적 특성으로 인해 2차원의 위상을 간직하면서도 공간화될 수 있는 효과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천 작업 위에 펜으로 그려진 나무들의 이미지는 프랙탈 구조와도 같이 단순하게 기호화된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

다. 기호와 공간, 단지 이 두 요소만을 가지고 재현적인 자연의 모습 보다도 공간과 시간의 혼합물인 자연 그 자체의 풍성한 느낌을 만들고 있다

는 점에서, 작가의 조형적 시도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만지지 않고  눈으로 보기만 해도 사각사각 소리가 들릴 듯한 노방천의 촉각성,  잠자

리 날개와도 같은 반투명성의 직조가 주는 공간감은 천에 그려진 기호들이 단지 시각적인 상징에 머물지 않고 관람자의 상상 속에서 빛과 그림

자가 어우러진 어떤 공감각적 풍경으로 가볍게 승화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올이 굵은 천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생기는 옵티칼 일루젼은

 손에 잡히지 않는 비물질적인 존재들이 지나가는 잔상처럼 찰나적인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김현수의 작품에서 너무 애쓰려하지 않는 듯한 담담한 감성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연을 차분히 관조하려는 시선을 견지하기 때문인 듯

하다.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 그는 침묵 가운데  기다리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자연은 폭력적인 소용돌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소근거리면서 자기들끼리의 대화를 하는"  모

습이며, 그 자신은 한 곳에 멈춰 서서 좀처럼 알아듣기 힘든 그 대화를 해독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청중인 것이다.


선명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  그러나 결코 하나의 관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그는 시각적 현상 너머에

있는  자연  그 자체의  충만함에 닿으려는 시도를 끈기있게  반복해 나가고 있다.